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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만주•연해주탐방답사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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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신이영 작성일 19-11-07 10:15 조회 200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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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만주•연해주탐방답사여행기/ 신이영(본 연대 공동대표)

2019년 8월 22일부터 8월 27일까지 엿새 동안 북만주와 러시아 연해주를 답사하고 돌아왔다. 유라시아문화연대에서 연례행사로 하는 유라시아 지역 탐방여행의 일환이었다. 이 지역을 선택한 이유는 금년이 3·1운동 100주년, 상해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이어서 이번 기회에 선조들의 항일투쟁 현장을 탐방함과 아울러 발해 옛터도 답사하기 위해서였다.

중국 만주는 어느 지역을 방문해야할지 잘 몰랐다. 그래서 4월 초순 남일여행사에 박기성·정철훈·현이섭 이사와 나, 넷이 모였다. 그리고 중국 동북부 지역과 러시아 연해주 지도를 펼쳐놓고 답사해야할 곳에 점을 찍어가며 표시를 했다. 발해 옛터로는 동경성을 찍었고 항일 유적지로는 미산(密山)지역의 싱카이호(興凱湖), 스리와(十里洼)를 선택했다. 그리고 러시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국경도시인 수이펀허(綏芬河)로 이동하는 코스를 잡았다.
여기까지 전세버스로 이동하기로 했다. 이어 러시아로 넘어갈 때 우수리강을 건너는데 기차를 이용, 국경도시 그라보데코에 도착하고 우수리스크, 블라디보스톡까지 또 버스로 이동하는 계획이었다.

또한 이번 답사지역의 명칭을 두고 여러 명명과 그 지역의 명칭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 내가 처음 北만주 여행으로 하자고 했더니 그건 아니고 東만주로 하자는 의견, 어떻든 북간도를 가니까 북간도로 하자는 주장도 나왔다. 내 주장은 흑룡강성 자체가 만주의 북쪽이니까 북만주로 해야 하고 답사하려는 사람이 신천지를 가본다는 호기심도 있을 거라 생각해서 결국 답사여행의 명칭은 ‘北만주-연해주 탐방답사’로 깃발을 내걸었다.
현지에 가서 보니 흑룡강성의 동쪽을 답사하는 거니까 중국의 경우 북간도임에는 틀림이 없다. 보통 북간도는 길림성과 흑룡강성의 동쪽 일부를 말한다.

첫날 인천공항에서 2시간여 걸려 흑룡강성의 무단장(牧丹江) 공항에 도착했다. 北만주 답사의 시발점이다. 목단강은 송화강의 지류면서 도시 이름으로 인구가 300만이라고 하니까 꽤 큰 도시다.
이날 오후는 온통 발해유적지를 둘러보았다. 맨 먼저 시내에서 약간 떨어진 발해(渤海)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유지(遺址)로 갔다. 일제시대부터 동경성(東京城), 동경성보(堡)라고 불렸는데 역사적 사실을 잘 모르고 붙인 지명이다. 여기는 동경 용원부 자리가 아니라 상경 자리였다. 지금은 ‘동경성[안] 마을’이라는 뜻의 동경성진(鎭)으로 부른다.
옛 궁성은 꽃이 만발하고 드넓어서 속이 확 트였다. 발해(698~926)는 228년 동안 존속했던 우리의 북방 국가였다. 그 다음 들른 곳은 ‘唐‧渤海國(당발해국) 불교문화박물관’과 발해석등(渤海石燈)이 있는 흥륭사였다. 이어서 ‘渤海上京遺址(발해상경유지) 박물관’을 끝으로 9세기경의 해동성국의 흔적을 주마간산격으로 관람했다.

목단강시에서 남쪽으로 80여km 떨어진 경치가 빼어나기로 유명한 징푸(鏡泊)호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현이섭 선생이 강추한 곳이다.
경박폭포에 가보니 장관이고 너무나 멋지다. 서로들 증명사진을 찍어댔다. 늦여름이지만 한국과는 달리 그렇게 덥지도 않았다.
입장료가 꽤 비쌌는데 65세 이상은 무료, 60~65세 사이는 50%, 60세 미만은 관람료를 다 내야한다. 아! 중국도 경로우대가 있구나.
징푸호 폭포 입구에는 1983년 10월에 등소평이 이곳을 방문해서 남긴 ‘鏡泊勝景’(경박승경)이라는 휘호, 그것을 새긴 기념비가 있었다. 다시 무단장시로 돌아와야 해서 급히 서둘렀어도 저녁 8시가 넘어서야 저녁을 하게 됐다.



경박폭포(김경희 회원 촬영)

둘째 날은 동북지역의 중요한 항일유적지를 방문하는 날이다. 8시 30분 호텔을 출발하여 우선 목단강변에 설치된 ‘八女投江 烈士群雄’(팔녀투강 열사군웅)조각상을 보러 갔다. 이것은 1938년 동북항일연군 소속 항일투사들이 목단강 지역에서 일제와 투쟁하다 강으로 몸을 던져 순국한 것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그 해 10월 항일연군은 이곳 목단강 연안에서 일제 군대와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일군의 압도적인 전력에 밀려 후퇴하게 되었다. 이 전투 중에 8명의 여성이 일제 군대와 끝까지 싸웠으나 탄약이 떨어지자 목단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8위(位) 열사 명단 중에는 안순복(安順福)(1915~1938), 이봉선(李鳳善)(1918~1938)이라는 2명의 조선족 여성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조각상의 큰 글씨는 주은래 전 총리의 부인인 덩잉차오((鄧穎超)가 썼다고 한다.

목단강시에서 출발하여 5시간 걸려 미산(密山) 싱카이호(興凱湖)근처에 도착했다. 점심이 끝난 뒤 일행은 잠깐의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싱카이호에서 보트를 타기도 하고 일부는 잘 정리된 저수지 둘레를 산책하였다. 다음 30~40분 거리의, 당벽진 봉밀산 아래 있는 ‘徐一總裁抗日遺蹟址’(서일총재항일유적지)를 방문했다.
 
서일(1881~1921) 총재는 대한독립군이 일본에 가장 큰 타격을 입힌 청산리 전투의 실질적 지도자로, 승리를 이끈 주역이다. 함경북도 경원 출신으로 일제를 깨부술 수 있는 것은 힘뿐이라고 믿었던 젊은 혁명가, 그 힘은 강고한 정신력과 무장의 바탕에서 나온다고 생각한 이다.
북간도 일대에서 만주 최초의 독립운동 단체 ‘중광단(重光團)’을 조직, 단장에 취임하였다. 3‧1운동 이후에는 중광단을 대한정의단으로 개편하였고 무장조직인 대한군정회를 설치하였다.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는 이후 대한군정부로 통합된 뒤 북로군정서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유명한 북로군정서가 바로 이것이다.
서일은 북로군정서의 최고 책임자인 총재였다. 김좌진은 총사령이었고 사단장은 김규식, 이범석은 연성대장이었다. 이들은 1910년 10월 청산리 전투에서 역사에 길이 남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무장독립운동 세력은 일본군에 밀려 열세를 면치 못했다. 그럼에도 서일은 1921년 이들을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조직, 전열을 가다듬었는데 이해 6월 자유시사변이 일어나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설상가상으로 자기가 세운 독립운동 기지 당벽진이 화적떼들의 습격을 받아 초토화가 되자 이에 대비하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고 스스로 호흡을 멈추는 방법으로 자결하였다. 일행은 진지한 자세로 서일 총재 유적지 비석 앞에서 묵념하였다.

오후 6시경 미산 시내로 들어왔다. 우리가 타고 다닌 30인승 버스가 지나갈 수 없는 데가 나왔다. 높이가 3m인데 이 차는 에어컨이 차 윗부분에 설치되어 있기 때문에 이곳을 통과할 수 없다. 운전기사가 자(尺)를 가지고 내려가서 높이를 재본다. 가이드도 이곳 교통여건을 잘 모르기 때문에 결국은 이곳 지리를 잘 아는 택시를 불러서 그 꽁무니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한바탕 소동이 난 뒤에야 겨우 밀산빈관에 도착했다.
 
셋째 날은 미산시 부근에 있는 스리와(十里洼)를 찾아 나섰다. 아침 9시 30분 그게 미산시 흥개진(興凱津) 부근에 있겠거니 하고 탐문 끝에 흥농촌(興農村) 부근으로 갔다. 처음으로 철로가 보였다. 정철훈 시인이 동청(東淸)철도라고 했다. 지금은 중동(中東)철도로 명칭이 변경되었다고 한다. 버스에서 내려 이곳저곳 가보았으나 도무지 유적지를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흥농촌에서 조선족 동포 김수남(金秀男)씨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유지비 설치 장소를 잘 알고 있었다.
그를 따라 숲길을 얼마간 갔더니 기념비가 불쑥 튀어나왔다.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십리와항일투쟁유적지기념비, 十里洼抗日斗爭遺址紀念碑’라고 한글과 한자로 병기된 기념비였다. 준비해간 약간의 제물과 술을 올리고 묵념하였다. 기념비는 미산시 인민위원회가 설치했고 도산기념회가 후원했던 것이라고 한다. 정말 답사다운 답사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들 뿌듯해했다. 김수남씨는 한국에서 몇 년 살았고 두 딸은 한국으로 시집갔다고 했다.

점심은 지시(鷄西)시 문합거(文合居)식당에서 하게 됐는데 진수성찬의 오찬파티여서 꽤 큰 계산이 나왔을 것이다. 답사팀에 합류한 내 친구 강인원 회장이 선뜻 부담해서 우리를 즐겁게 했다. 지시시는 부근의 ‘닭벼슬산’[鷄冠山] 서쪽에 도시가 생겨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오후 내내 포장이 안 된 흙길을 달려 동녕현(東寧縣) 삼차구(三岔口)로 향했으나 너무 시간이 걸려 방문 계획을 취소했다.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해서 그 생활상을 보려고 했는데 무산된 것이다. 숙소는 국경도시인 수이펀허(绥芬河)에 있었다. 다음날 기차를 타고 러시아 연해주로 가기 위해서였다.
 
넷째 날 열차 출발 시간보다 2시간 전에 수이펀허역에 도착했다. 출국 절차에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서두른 것이다. 표와 짐 검사, 보안 체크 등 출국 심사를 받는데 1시간 30분이상이 소요되었다. 9시 52분 수이펀허역을 떠나서 1시간 30분이 걸려 러시아 연해주 그라보데코역에 도착했다. 거리는 27km에 불과한데 수이펀강을 건너면서 느릿느릿 가다보니 시간이 꽤 걸린다.
그라보데코의 입국 심사는 너무나도 오래 걸렸다. 역 플랫폼에서 2시간 넘게 기다렸다가 오후 2시 10분경에야 입국 심사대에서 서게 되었다. 러시아인과 비자 받은 단체손님이 우선이다. 아무리 빨리 줄을 섰어도 이 우선권 때문에 맨 나중에야 우리 차례가 돌아왔다. 계속 후순위로 밀리며 우리는 그런 질서를 정말 못마땅해 했다.

오후 4시 가까이가 돼서야 그로보데코를 떠나 우수리스크로 가게 되었다. 연해주에서 가이드가 러시아 사람 나타샤로 바뀌었다. 오후 5시경 우수리스크 도착해서 늦은 점심을 들게 되었는데 한국식 반찬이 나왔다. 6시가 다 돼서야 시내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이상설선생 유허지’비가 세워진 곳에 갔다. 한글로만 된 비였다. 일행은 묵념을 한 뒤 기념사진을 찍었다.
충북 진천에서 태어나 의정부 참찬을 지낸 이상설(1870~1970) 선생은 1907년 고종황제의 밀지를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대표로 참석했다. 이준, 이위종을 대동하고 이 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였다.

이후 러-만 국경지대 한흥동에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주력하였다. 1910년에는 국내외 의병운동을 통합, 효과적인 항일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유인석, 이범윤, 이남기 등과 13도 의군을 편성했으며 한일합방이 되자 성명회(聲明會)를 조직, 각국에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한민족의 독립 결의를 밝히는 선언서를 보냈다.
1914년에는 중국과 러시아령의 모든 한인들을 모아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를 세워 정통령에 선임되었다. 1915년에는 상하이에서 박은식, 신규식, 조성환 등과 신한혁명당을 조직, 본부장에 취임하였고 1917년 이곳 우수리스크에서 병사했다.
임종을 맞이하여 선생은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을 모두 불태우고 재는 날려버린 뒤 제사도 지내지 마라. 그리고 동지들은 함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하셨다 한다. 유언에 따라 시신은 화장하고 재는 수이펀 강물에 뿌려졌다.
이어서 유허지에서 가까운 발해성터를 방문했는데 수이펀강이 흐르는 곳이었다. 올해 비바람이 많았는지 강물이 세차게 흘렀고 식물들이 자빠진 곳이 많았다.

우수리스크 호텔에 여장을 풀고 8시경 샤슬릭 저녁을 먹는데 불과 3시간 전의 점심 때문에 대부분 밥과 샤슬릭은 손도 대지 않고 야채와 과일만 든다. 늦은 점심 때 술을 마신 탓인지 저녁은 아무도 원치 않는다.
그런데 정철훈 소장이 조지아 와인이 좋다고 선전해서 분위기상 한 잔씩은 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구수경, 김경희, 최옥진 세 여성이 와인 값은 자기들이 내겠다고 했다. 와인 두 병을 주문해서 모두가 즐거운 마음으로 그 양풍식당의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늦게 호텔에 돌아왔지만 어쩐 일인지 남자들은 하나 둘씩 강인원, 이계풍님 방에 모였다 자연스레 여러 재미있는 환담과 파티가 열렸다. 최유진 교수가 막 문 닫으려는 수퍼에 가서 큼직한 러시아 맥주를 사와 분위기가 한층 고조되었다. 특히 강인원 회장의 사주팔자 이야기는 주위를 집중하게 만들었다. 일부 여성들도 어떤 다른 방에 모였던 모양이다.


다섯째 날은 오전에 우수리스크 일원의 항일기념관을 방문하고 오후에는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일정이다. 제일 먼저 들른 곳이 ‘최재형 기념관’이었다. 1919년에서 1920년까지 살던 고택을 기념관으로 만든 것이다.
최재형 선생(1860~1920)은 연해주의 대표적인 항일 독립운동가다. 함경북도 경원 출신으로 아버지는 노비고 어머니는 기생이었다. 열 살 때 아버지 손에 이끌려 러시아로 온 뒤 천신만고 끝에 입신에 성공, 군수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다. 러일전쟁에 해군 소위로 참가한 후 항일운동에 뜻을 두고 1907년에 동의회(同義會)를 조직, 총장이 되었는데 안중근이 평의원으로 참가한 단체였다.
동의회는 산하 의병부대로 대한의군을 두었다. 대한의군은 국내진공작전을 펴 러시아 국경의 일본군 초소와 소규모 부대들을 습격했는데 참모중장 안중근이 활약이 눈부셨다.
최재형은 자금난으로 문을 닫게 된 해조신문을 인수한 뒤 <대동공보>를 발행,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사장과 권업회 총재로 재직하며 30여 개의 학교와 교회를 설립하는 등 한인을 위한 지원사업도 펼쳤다. 1919년 4월 대한국민의회 외교부장과 9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에 선임된 그는 이듬해 4월 시베리아 출병을 단행한 일본군이 연해주로 쳐들어오자 재(在)러 한인의병을 모두 모아 시가전을 벌이다 체포돼 순국했다. 지난 1962년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지만 그동안 묘지와 기념비 없이 잊힌 영웅으로 방치돼 있었다.

그 다음 방문한 곳은 ‘고려인 문화센터’였다. 연해주 정부, 고려인, 한국의 개인과 단체가 합작해서 건립한 연해주지역 항일역사관이다. 경내에는 홍범도 장군상, 안중근 의사의 기념비가 있었다. 센터 안에 들어가 간단한 소개 영화를 본 뒤 정철훈 소장과 함께 센터 2층에 올라가 이곳의 부책임자인 우수리스크 고려인 민족자치회 부회장인 이바짐 선생을 만났다. 그리고 우수리스크의 고려인 생활상을 듣게 되었고 독립운동에 대한 이곳 사람들의 자부심을 알게 되었다.

오후에는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했다. 우수리스크와는 약 100km 거리다. 도중에 라즈돌리노예역을 들렀는데 1937년 연해주에 살고 있던 고려인 20만 명을 중아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던 시발지였다. 지금도 이용하는 역이지만 승차하는 이들은 드물다고 한다.
오후 2시 30분경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했다. 신한촌(新韓村) 기념탑을 필두로 러시아 함대의 잠수함 박물관, 니콜라이 2세 개선문, 주말에는 시장이 열린다는 혁명광장, 요새 박물관과 해양공원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러시아 가이드 나타샤는 개방적이고 자유분방한 러시아인이었다. 곳곳에서 재미있는 설명을 할 때면 종종 웃음바다가 되곤 하였다. “지금 고르바초프는 미국 시민으로 살고 있고 푸틴 일가와 딸도 미국에서 사는데 왜 거기서 살겠는가?” 같은 비판도 서슴치 않는다. 러시아가 그 만큼 규제가 심하고 인권과 시장 경제에 문제가 많은 데 대한 불만이 큰 듯하다.
Azimut호텔에 여장을 풀고 호텔 근처 밤 마실을 나갔다. 호텔근처 해변 쪽 카페 나들이였는데 신상철님이 한 잔을 샀다.

마지막 날은 오전에 블라디보스톡 시내를 구경하고 오후에 귀국을 한다. 맨 처음 가본 곳은 블라디보스톡역.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시발점이라는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 모스크바까지 9,288km. 기차로는 1주일이 걸리고 항공편으로는 8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한 번쯤은 흰 눈 속의 시베리아 벌판을 달리고 싶다.
그 다음 간 곳은 빠크롭스키 중앙교회, 대표적인 러시아 정교회다. 김석년 감사로부터 간략한 정교회 역사에 관해 설명을 들었다.
이른 점심을 먹고 공항으로 향했다. 한국을 출발할 때는 중국 남방항공을 이용했는데 블라디보스톡에서 돌아올 때는 대한항공을 탔다. 거의 3시간이 걸린다. 북한 하늘을 날지 못하고  중국 동북지역을 거쳐 서해로 진입해 오기 때문에 시간이 더 걸리는 것 같다. 하루 빨리 한반도를 마음대로 오갔으면 좋겠다.
    *주:유라시아문화산책 제6호에 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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